전시 히스토리 #6 《리메이크 코리아》: 고정된 의미의 확장과 재구성
안녕하세요, 코리아나미술관입니다!
‘작품 ○○○ 리메이크된다.’라는 뉴스나 기사 많이들 접해보셨지요? 리메이크(remake)란, 원작을 차용하여 이를 다시 만드는 작품 제작의 방식을 말합니다. 특히 영화나 드라마, 음악 등의 대중 예술 분야에서 널리 활용되어 우리에게도 친숙하지요. 이를테면 얼마 전 종영한 <이태원 클라쓰>처럼 <미생>, <치즈인더트랩>, <신과 함께> 같은 웹툰 작품들이 실사 영화나 드라마로 재탄생하고 있는 것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근래에는 즐겁게 감상한 콘텐츠가 알고 보니 원작이 있는 리메이크 작품이었던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오늘날을 ‘리메이크 전성시대’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리메이크와 관련하여 오늘 소개해 드릴 전시는 코리아나미술관이 초창기 선보였던 《리메이크 코리아 Remake Corea》(2005)입니다. 《리메이크 코리아》는 전통 산수화, 화조화, 풍속화, 고분 벽화 등 한국 전통미술에 등장하는 대표적 도상들을 차용하여 이를 오늘날의 사회, 문화, 사상과 연결하는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리메이크’라는 차원에서 접근했던 전시입니다.
코리아나미술관 전시 히스토리
그 여섯 번째 이야기에서는,
원작의 고정된 의미를 확장하여
전통을 재구성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전시,
《리메이크 코리아》를 소개합니다!
#6
리메이크 코리아
Remake Corea
2005. 1. 20 - 2005. 3. 26.
참여작가
김지현, 김두진, 김자혁,
임민욱, 고낙범, 손정은,
김준, 박미나,
아나 로라 알레즈
리메이크의 활용은 대중 예술뿐만 아니라 시각 예술의 흐름에서도 오랜 역사를 갖습니다. 그리스 미술을 권위 있는 정전(canon)으로 참조했던 르네상스와 신고전주의 미술가들을 거쳐, 마네(Edward Manet), 피카소(Pablo Picasso), 뒤샹(Marcel Duchamp), 레빈(Sherrie Levin)에 이르는 현대 미술가들은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인용‧각색하여 원작의 구조와 의미를 끊임없이 변형하고 확장해왔습니다. 특히 기존의 이미지를 새로운 맥락으로 제시하는 ‘차용(appropriation)'은 모더니즘 미술이 중시했던 원본의 지위와 오리지널리티의 신화를 공격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주요 전략으로 활용되었지요.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이 같은 흐름을 ‘저자의 죽음(The Death of the Author)’으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바르트에 따르면, 현대에 이르러 저자는 더 이상 인식론적으로 자율적인 주체로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화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존재하는 사회, 문화, 언어 등의 체계 속에서 끊임없이 의미들을 참조하고 인용하는 필사자(scripter)에 가깝죠. 이와 마찬가지로, 작품이라는 것 역시 창조적 주체인 저자와 근원적으로 연결된 유일무이한 ‘원본(origin)’이 아니라, 독자의 해석이나 그것이 활용된 문맥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며 복수적으로 존재하는 유동적인 ‘텍스트(text)’라는 겁니다.
《리메이크 코리아》에서 옛 그림이나 도상이 지닌 유일무이한 원본성의 가치는 작가들의 리메이크 과정에서 새로운 맥락에서 재구성됨으로써 다층적인 의미를 획득합니다. 여기서 새로운 맥락이란 바로 21세기라는 현재의 시점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리메이크 코리아》에서는 동시대의 다양한 특징과 맥락이 리메이크의 과정의 주요한 축으로 개입하면서, 과거 아날로그 방식에서 만들어진 원작이 오늘날의 디지털 기술과 교차하거나,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원작이 가진 과거의 고정된 정체성을 오늘날의 언어로 와해시켜나가는 시도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원작이 간과하고 있거나 미처 드러내지 못한 부분들을 현재의 시점으로 다시 표현하고 이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이번 '리메이크 코리아'전에
소개된 작품들은
단지 전통의 도상을 일회적으로
변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끝없이 리메이크될 수 있는
'멀티플(multiple)'의 세계를 제시한다.
즉 이번 전시작품들은
한국의 전통미술이라는 형태에 대해
의미의 차이를 유발하는
멀티플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이 문화적
지속의 차원에서 기여할 수 있는
가장 흥미롭고 놀라운 영역이다.
- 유진상 (미술평론가, 계원조형예술대학 교수) -
그럼 이제 《리메이크 코리아》의 작품들을 살펴볼까요?
Kim Jong Ku, steel filing painting, steel filings on cotton cloth, 220x720cm, 160x720cm, 2005. Installation view at Coreana Museum of Art, Seoul
김종구 작가는 전통 산수화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상기시키는 붓과 먹 대신, 현대문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철(쇠)의 가루와 비디오 영상을 활용하여 산수화의 현대적 리메이크를 시도합니다. 전통 산수화에서는 먹을 가는 행위부터 작품의 시작으로 보았으며, 여기에 작품을 준비하는 마음을 닦는다는 수행적인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작가는 쇠를 연마하는 과정을 통해 이러한 육체적·정신적 수행의 의미를 재현하며, 마치 벼루와 먹의 마찰과 마모로 먹물이 생겨나는 것처럼, 작품의 재료가 되는 쇳가루를 생성합니다. 또한 이렇게 얻어진 쇳가루로 쓰인 글씨들은 카메라 렌즈를 통해 높고 낮은 산세의 풍경들로 전치되어 디지털 산수화 영상으로 화면에 투사됩니다. 수행을 통한 쇠의 연마, 물질과 가상의 혼합, 글씨와 그림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창출되는 김종구 작가의 메타 산수화는 옛 산수화에 대한 탁월한 동시대적 해석으로 볼 수 있습니다.
Lee Soon Jong, Woman on the water, Indian ink on Korean paper, 143 X 73, 2005. Courtesy of the artist
여성에 대한 고정적인 의미화와 그 해체를 탐구해 온 이순종 작가는 조선시대 미인도를 회화와 영상 작품으로 리메이크하는 작업을 통해 여성성의 본질에 대해 질문합니다. 신윤복의 미인도에 등장하는 여인에게서 기생의 육체성과 사제의 종교성이라는 이중적 속성을 발견한 작가는 이를 섬뜩하면서도 아름다운 여성 이미지로 재탄생시킵니다. 여인은 후광을 지닌 성자처럼 등장하기도 하고, 메두사처럼 기괴하고 치명적인 힘을 인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특히 그의 작품에서는 머리카락이 빈번하게 등장하는데요,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섬세하게 표현된 여성의 머리카락은 가부장적인 시선에 저항하는 여성의 감추어진 힘과 욕망을 나타냅니다. 성적이면서 성스럽고,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이순종 작가의 미인도는 여러 경계에 걸쳐있는 신(新) 미인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Kim Jee Hye, Luxurious Life, mixed media on canvas, 240x125cm, 2005. Courtesy of the artist
김지혜 작가는 민화의 책거리 그림을 대중 소비사회에서의 초상으로 탈바꿈합니다. 전통 민화는 주로 책이나 문구류 같은 일상용품을 소재로 하며, 자유로운 시점과 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오방색의 사용을 그 특징으로 합니다. <책거리그림-Luxurious Life>에서 작가는 이러한 전통적 민화의 코드를 현대 소비사회의 화려한 이미지들로 대체합니다. 눈부신 형광 톤으로 그려진 컴퓨터와 CD플레이어, 반짝이는 에나멜 구두와 화려한 서양식 가구들은 현대인의 소비 욕망을 나타냅니다. 이를 통해, 본래 학문 의욕을 고취하고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그려졌던 책거리 그림은 세속적인 삶에 대한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기호가 됩니다.
Lim Yong Kil, The White Tiger in Terrarium, animation, 2005. Courtesy of the artist
부적, 십이지신 등 한국 고유의 기복신앙을 판화와 영상작품으로 형상화해 온 임영길 작가는 고구려 고분 벽화를 오늘날의 서울로 소환한 3D 영상작업으로 리메이크합니다. 작가는 2005년 당시 서울시의 지형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테라리움이라는 가상공간 속에 고구려의 우주관과 세계관을 반영한 신화적 동물들을 등장시키는데요.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각각 동, 서, 남, 북 방위의 수호신이며, 동쪽 하늘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가, 서쪽 하늘에는 달을 상징하는 두꺼비가, 남쪽 하늘은 무병장수를 관장하는 남두육성이, 북쪽 하늘은 사후세계를 관장한다는 북두칠성이 자리한다는 고구려의 세계관과 기복신앙을 테라리움 용기의 네 방면과 지붕 형태의 네 방면에 대입시키며, 고대 신화의 상징체계와 서사 구조를 디지털 언어로 재활성화합니다.
Lyu Jae Ha, duck, wood, LCD monitor,movie 2 min, 35x53x12cm, 2005. Courtesy of the artist
류재하 작가는 과거의 시간과 향수가 담긴 고가구에 현대 문명의 상징인 모니터를 결합하고, 여기에 전통적 도상이나 서구 미술사의 도상, 현대인의 얼굴 같은 영상 이미지들을 혼합하여 오브제와 영상 이미지가 혼재된 복합 콜라쥬를 만들어냅니다. 가령 그의 작품 <오리>에서, 오리 형상의 민속품은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비너스 이미지와 혼합되고, 이는 다시 상감 청자의 문양들과 교차합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서양과 동양, 과거와 현재가 얽혀있는 혼성적인 오브제는 그 자체로 중심 없는 편린들이 부유하는 현대 사회의 메타포로 기능합니다.
작가의 의도에 따라 과거의 도상을 변형하고 새로운 조형 언어로 현시대의 이미지들과 교차시키는 《리메이크 코리아》는 옛 그림들이 지닌 상투적인 특성과 일차적인 의미를 또 다른 차원의 의미로 바꾸는, 과거에 대한 일종의 ‘다시 읽기’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 작품의 출발은 과거에 있으나, 작품 속에서 현대인의 삶과 의식과 조우하여 오늘날의 맥락으로 재구성된다는 점에서 동시대성을 획득하며 그 자체로 의미의 탈중심화와 다층화를 은유합니다. 앞으로도 코리아나미술관은 다양한 전시와 프로그램을 통해 동시대 예술의 주요 이슈에 주목할 뿐만 아니라, 이처럼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다시 읽기’ 작업을 시도할 예정입니다. 계속해서 애정을 가지고 지켜봐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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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리메이크 코리아 Remake Corea 』 전시 도록, 코리아나미술관, 2005.
Roland Barthes, “The Death of the Author”, Image, Music, Text, 1977. p.145. Roland Barthes, The Pleasure of the Text (New York: Hill and Wang, 1975);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역, 동문선,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