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olumn

  • home
  • 학술•연구
  • c-column

[쿨투라 2024.10]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우리가 나눌 수 있다면: 《불안 해방 일지》

  • 강수미

문화잡지 《쿨투라》 2024년 10월호(통권 124호)

원문링크: https://www.cultura.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44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우리가 나눌 수 있다면: 《불안 해방 일지》 전
  •  강수미(미학. 미술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확대이미지
《불안 해방 일지》 전시장 전경,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혼자 내부에서 밖으로 꺼내기

불안한 것, 두려운 것, 싫어하는 것. 이는 심리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동시에 그런 감정을 유발하는 대상을 의미할 수 있다. 그것들은 전염성이 강하다. 이를테면 미국 경제지표가 흔들리면 불안 심리가 확산되어 전 세계 주식시장이 줄줄이 폭락한다. 긴급 재난 경보가 울리면 사람들은 무서워하는 서로를 보며 더 큰 공포감을 느낀다. 싫은 것을 보고 움찔하는 사람 옆에서 당신 또한 덩달아 가볍게 몸을 떨거나 인상을 찌푸린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불안, 공포, 혐오의 감정은 전염성이 강하다.

하지만 이것들은 오롯이 주체 혼자 겪어야 하는 지각이기도 하다. 우리는 기쁨도 슬픔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심리의 저 깊은 곳에서 피어올라 끈질기게 주체를 흔드는 불안은 누구와 나누기 곤란하다. 두려움 또한 그러하다. 혐오는 조금 더 복잡한데, 그것을 잘못 표현하면 차별적인 인격의 소유자거나 까다로운 인간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혼자 품기에는 버겁고 부정적인 그런 감정을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곪아 터질 때까지 자기 내부에 가둔다. 아니, 주체가 감정에 갇힌다.

코리아나미술관이 2024년 하반기 기획한 《불안 해방 일지》(2024. 8. 7. - 11. 23.)의 미학적이고 사회학적인 기능이 여기 있다. 즉 그 기획은 바로 그러한 부정적 감정의 외재화externalization, 표현presentation, 전시exhibition를 지향한다. ‘exhibition’이 라틴어로 ‘밖으로 꺼내다, 보여주다, 제시하다, 전달하다’라는 뜻의 ‘exhibitus’와 ‘exhibere’를 어원으로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불안’과 ‘해방’을 주제로 한 현대미술전 《불안 해방 일지》는 출발점에서부터 역할을 명확히 한 것이다.

요컨대 이 기획전은 주체의 내부에 갇히고 고립되는 불안이라는 정서를 밖으로 꺼내 그 존재를 보여주고, 이미지로 제시하고, 감상자에게 전달하는 감각의 전시 장場을 자처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우리가 전시를 매개로 그 부정적 지각상태를 서로 나눔으로써 불안으로부터의 ‘해방’을 도모해보자는 집단적 실천 ‘일지’인 셈이다. 전시의 영문 제목 ‘Anxieties, when Shared불안이 공유될 때’는 나의 이런 해석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그리고 “외부 세계와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내면의 불안이나 사회경제적 원인과 구조에서 발생하는 불안을 다층적으로 탐색”해온 9명 젊은 미술가들의 작품으로 “공감과 위안을 선사하고자”1한다는 기획 취지는 이 전시를 볼 방향을 안내해줄 것이다. 요컨대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 같은 불안을 혼자 가슴에 껴안고 사는 대신, 예술을 통해 그것을 꺼내고 서로 인정하며 나누자는 것.

 

뜨거운, 찬찬한


《불안 해방 일지》는 코리아나미술관 지하 1층 전시장에 이예은, 조주현, 양유연, 신정균, 도유진의 작품을, 지하 2층에는 백다래, 이원우, 김미루, 김지영(109)의 작품을 배치 및 전개하는 형태로 구현되었다. 두 공간을 잇는 벽과 계단에는 이예은의 사진과 이원우의 작품 일부가 디스플레이 되고, 김지영(109)의 벽 드로잉과 함께 5채널 사운드 작품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며 전시 전체를 유기적으로 만든다. 그런데 이 전시는 관객이 그 같은 전시장의 물리적 관계성이나 계산된 작품 디스플레이에 따르기보다 감상자 자신과 전시/작품이 마주치며 발생하는 느낌에 따라 임의적 감상이 이뤄지는 특성이 있다.


양유연, <휘광>, <그늘진 나 자신을>, 2019, 장지에 아크릴, 각 150×210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Stephen Friedman Gallery, 사진: 강수미

가장 직접적인 예는 B1 1층에 들어섰을 때,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음에도 저 안쪽 깊숙한 곳에서부터 뻗어 나오는 어떤 인광燐光에 관객의 시선이 붙들린다는 점이다. 끈적거리고 번들거리는 촉감이 느껴지는 그 빛은 사실 양유연의 인물화 <휘광>에 묘사된 검은 두 눈동자, 그 위에 찍힌 두 개의 흰 점이다. 작가는 어느 젊은 여성의 얼굴을 눈썹부터 인중까지만 클로즈업해서 장지에 아크릴로 그렸다. 묘사된 형상으로는 이처럼 단순하지만, <휘광>은 말로 번역하기 힘든 인간의 복잡한 심경(불안에서 비애까지)을 빛과 칠흑이 대조되는 텅 빈 눈동자 및 희디흰 뺨으로부터 뿜어낸다. 그것도 회화예술답게 침묵으로. 그래서 관람자의 동선動線이 큐레이팅을 따라 전시장 앞쪽 작품들에서 뒤쪽 작품들로 순차적으로 이어지는 대신 전면부를 건너뛰고 그 그림으로 빨려들 듯 들어서게 된다. 이를테면 특정 작품의 자극에 반응해 감상자 개인의 변칙적 심리-지리적 감상이 생성되는 것이다.


이는 이 전시가 지향하는 감상 포인트와도 의외의 방식으로 맞아떨어지는 효과다. 앞서 인용한 글에서 기획 측은 동시대인들, 특히 한국사회 “청년 세대”가 겪는 내면의 불안과 사회경제적 불안을 동시에 조명하고, 그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예술가들의 “진솔하고 재치 있는 시도”를 공유한다는 목표를 밝혔다. 때문에 내 생각에 《불안 해방 일지》는 양면적 감상 포인트를 구사해야 한다. 한편으로 즉흥적이고 직관적인 불안감이 작품에서 감상자에게로 전달되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감상자가 작품을 매개로 불안을 이해하거나 사고해보는 이지적 활동이 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작품의 불안에 대해서, 비유하자면 불에 덴 듯 뜨겁게 반응하거나 물속을 들여다보듯 찬찬히 숙고하거나. 단순하게 구분할 수 없지만 《불안 해방 일지》에서 양유연의 인물화는 대표적으로 전자의 역할을 한다. 그 그림들은 불안한 감성을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면서 동시에 보는 이가 그 감성의 전염을 경험하게 되는 심미적 대상인 것이다. 반면 B1 전시장 앞쪽에 배치된 이예은의 <무모 연작> 사진들과 조주현의 <무착륙비행> 싱글채널 비디오, 그리고 다시 뒤쪽 전시장에서 상영되는 신정균의 싱글채널비디오 <미래 연습>과 도유진의 다큐멘터리 <오픈 셔터스>는 두 번째 감상 포인트에 맞다. 그것들은 작가가 ‘불안’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거나 고찰해서 이미지화한 결과다. 또는 그 감정을 현실의 객관적 현상들로 외재화하거나 그 감정과 관련된 여러 현실사회의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풀어낸 것들이다. 이 같은 작품들은 특히 비평적 분석을 필요로 하는데, 그만큼 개념적인 의도가 있거나 전달하고자 하는 강한 메시지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먼저 이예은의 <실내 온도 높이기>, <높이재기> 등 <무모 연작> 사진을 보자. 1994년생인 이 작가는 대부분의 미술가들이 그러듯이 생계와 창작을 병행하기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감내해왔다. 미술로 먹고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보다 더 소박한 욕망인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조차 기대하기 힘든 현실을 벗어나지 못한 채로 말이다. 그런데 이예은은 거기서 거대 자본주의 시스템이 유발하는 자신의 존재론적 불안을 무모한 시도로 치환하는 작업을 창안해낸 것 같다. 그것이 <실내 온도 높이기>에서는 겨울날 꽁꽁 언 콘크리트 외벽을 자신의 몸으로 데우는 어처구니없는 행위로, <높이재기>에서는 시골 하천의 녹슨 다리에 작은 공처럼 매달리는 위험천만한 행위로 사진에 포착되었다. 분명 무모하고 무의미한 퍼포먼스다. 하지만 삶에 출구가 없다고 느낀 적이 있는 어떤 감상자는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스스로의 불안을 견디기 위해 은밀히 기이하고 비생산적인 행동을 해본 경험을 떠올릴지 모른다. 그리고 작가의 절박함이 만들어낸 <무모 연작>에서 조용한 공감과 무겁지 않은 위로를 읽어낼 것이다.


이예은, <높이재기>, 2023, 피그먼트 프린트, 75×100cm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이예은, <실내 온도 높이기>, 2021, 피그먼트 프린트, 56x84cm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조주현의 <무착륙비행>은 팬데믹 초기 전 세계 국경이 폐쇄된 가운데 항공사가 내놓았던 여행상품을 모티프로 한다. 많이들 기억하겠지만 가령 인천공항에서 이륙해 어디에도 착륙하지 않고 허공을 날다가 다시 인천공항으로 돌아오는 비행 상품이 실제 출시되었고 판매도 되었다. 조주현은 그렇게 지상뿐만 아니라 하늘까지 셧다운된 코로나 시국에서 우리 모두가 겪었던 인프라스트럭처의 붕괴, 끝없는 불확실성, 만연한 깊은 불안을 9분 15초의 영상으로 현상했다.

이러한 사회적, 동시대적 불안은 신정균의 <미래 연습>에서는 과거적 경험이 아니라 앞으로의 재난에 대비하는 모의 훈련 상황에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표상된다. 그는 대형 백화점에서 시행한 화재 대응 가상훈련을 소재로 허구를 실제처럼 영상화하는 모큐멘터리mockumentary, mock+documentary 작품을 만들었다. 영상에서는 가짜 화재 상황 아래 사람들이 공포를 연기하며 대피하고, 인명구조 크레인과 에어매트가 펼쳐지는 장면이 나온다. 그와 함께 이 모든 것이 연출이니 ‘안심하고 쇼핑을 즐기라’는 방송이 교차 편집된다. 감상자 입장에서는 헤드셋을 쓰고 <미래 연습>을 한참 보다가 그 허구적 상황(재난의 가정)과 실제적 목적(재난의 대비)을 알아채게 된다. 순간 감상자가 실재와 허구가 결합되어야만 성립하는 그 현장의 리얼리티를 인식한다면 신정균의 작품은 창작 의도를 실현한 셈이다. 요컨대 그의 모큐멘터리는 위험을 통제하려는 집단의 욕망이 모의 훈련으로 형식화되는 행정 체계와 그에 순응하는 사람들의 행위까지가 현실이라고 인정하며 그에 대한 거울작용을 행하기 때문이다.


신정균, <미래 연습>, 2021, 싱글채널 비디오, 7분 20초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반면 도유진의 <오픈 셔터스>는 타인, 특히 여성에 대한 불법 촬영이 횡행하지만 공권력과 사법체계가 그 범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현실의 난맥상을 신랄하게 다룬다. 그 난맥상은 영상 중 관련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조차 불법 촬영의 피해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대목에서는 차라리 이 다큐멘터리가 촌스러운 자작 드라마이기를 바랄 정도로 어처구니없다. 우리는 불법 촬영으로부터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작품으로 확인하면서 익숙한 공포와 좌절을 재인하게 된다.


아름다운 미래, 비언어적 공유

하지만 《불안 해방 일지》는 B2 전시장의 작품들을 통해 불안에 대한 동시대 미술가들의 대응 방법을 공유한다. 물론 그것은 정신의학적인 처방이나 정신분석학적 임상 치료와는 다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저자 마크 피셔는 제조업의 시대가 저물고 정보산업이 본격화된 포스트포드주의 사회에서 정신 질환을 “개인의 화학-생물학적 문제로 간주”하는 현실을 비판했다.2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경제구조와 산업시스템의 끊임없는 변화로 인한 불안정성 앞에 신체적, 정신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근절되지 않는 불안에 삶이 잠식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대 사회는 그것을 정신과 약이나 호르몬제 처방으로 막고 있다. 그것은 정부나 지자체가 공동체 구성원의 불안을 정책적으로 관리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문제의 원인과 해결을 각 개인의 몫으로 돌린다는 점에서 미봉책도 안 되는 해법이다.


이원우, <달빛 담요, 새터데이 무드>, 슈퍼 미러 스테인리스 스틸, 스틸, 페인트, 실크 스크린, 54x40cm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김지영(109), <싱잉노즈 Singing Nose>, 2024, 5채널 사운드 설치, 벽에 목탄, 콘테, 가변크기
《불안 해방 일지》 전시장 전경,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그럼 예술을 통한 불안의 치유는 유효한가. 단순한 사실 중 하나는 사람들이 미술작품을 감상하며 무엇인가를 느끼고 생각에 잠기고 타인/이질적인 존재와 접촉할 가능성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고, 미술의 형질이 달라지면서 그런 치유적 미술의 역량도 다양화를 이뤄왔다는 점이다. 그런 미술의 계보는 《불안 해방 일지》에서 김미루가 관객과 마주앉아 같이 흙을 만지며 몸짓, 손짓, 표정, 눈빛으로 대화하는 퍼포먼스 작품으로 명시되었다. 다른 한편, 당신은 이원우가 슈퍼 미러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에어 워즈Air Words> 시리즈를 보며 과도한 주의집중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회화와 조각의 중간 형식을 취한 그 작품들은 무지개색 스펙트럼이 전사된 고광택 표면 위에 좋은 말, 시적인 메시지를 써넣은 것이다. 당신은 가령 그 표면에서 “YOUR BEAUTIFUL FUTURE당신의 아름다운 미래”, “MOONSHINE BLANKET달빛 담요”, “SATURDAY MOOD토요일 분위기” 같은 말-이미지를 보는 둥 마는 둥, 읽는 둥 마는 둥 할 수 있다. 그 헐렁하고 정신 산만한 감상이 당신에게 좋은 감상이다.

우리는 일할 때는 물론 쉴 때조차 눈 깜빡임도 거의 없이 디지털 기기에 모든 신경을 털어 넣고 소셜 미디어에 관심을 집중한다. 관심경제, 과잉 각성, 도파민 중독, 포모FOMO증후군…. 진단이야 어떻든 과도한 관심지향은 현대적 불안의 원천이며 과도한 주의집중은 불면, 신경증, 공격성으로 비약한다. 여기서 길게 논할 수 없지만, 관련 주제로 나는 발터 벤야민의 ‘정신분산Zerstreuung, distraction’ 개념에 대한 새로운 탐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근대 미술관이 전시 아젠다를 달성하려면 감상자의 관심은 “숙고와 정신 분산적 분리”라는 이중 치료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봤다.3 요컨대 전시가 감상자에게 내면적인 집중과 동시에 외부를 향한 산만한 관심을 유발한다면 그/녀는 정신적으로나 감각 지각적으로나 특별한 해방의 상태를 경험할 것이다.
 

1 코리아나미술관, 《불안 해방 일지》 기획 글 참조. 2024.
2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대안은 없는가』, 박진철 옮김, 리시올, 2018, 70쪽.
3 Carolin Duttlinger, “Between Contemplation and Distraction: Configurations of Attention in Walter Benjamin”, German Studies Review, Vol. 30, No. 1 (Feb., 2007), pp. 38-39.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