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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다시보기 #25 《Step X Step》: 일상의 스텝에서 시작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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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Step X Step

2023. 9. 14. – 2025. 11. 30.

참여 작가

Bruce Nauman 브루스 나우만

Every Ocean Hughes 에브리 오션 휴즈

Tsai Ming-liang 차이밍량

Klara Lidén 클라라 리덴

Suki Seokyeong Kang 강서경

Jehyun Shin 신제현

Pauline Boudry/Renate Lorenz 폴린 부드리/레나테 로렌츠



약 380만 년 전, 인간은 처음으로 두 발로 걸었다고 과학자들은 말했습니다.

이 직립보행의 순간은 단순한 해부학적 변화가 아니라, ‘움직임에 의한 의식의 탄생’을 의미했습니다. 손이 자유로워지면서 인간은 들고, 운반하고, 사냥하고, 무언가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시선은 땅에서 멀어져 수평선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몸은 세계를 새롭게 감각하고 이해하는 도구가 되었고, 인간의 사고는 그 움직임과 더불어 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걷기를 통해 해부학적으로 현대적인 인류(anatomically modern humans), 즉 현생 인류 Homo sapiens는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고, 그 여정 속에서 요리, 언어, 도구, 이미지의 제작 능력 등 인간만의 특징을 포함한 행동적 현대성(behavioral modernity)을 발전시켰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현대 인간’이라 부르는 모습은 바로 그 걸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걷기는 인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근원적인 행위이기에, 우리는 발자국이라는 은유로 개인의 성장과 인류 전체의 진화를 동시에 말합니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를 넘어, 존재가 자신을 증명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게 인간은 어느 순간부터 ‘걷는 몸’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후반, 영국 사진가 에드워드 머이브리지(Eadweard J. Muybridge)는 사진을 통해 움직임을 분석하려 했습니다. 말이 달릴 때 네 다리가 동시에 공중에 뜨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시작된 그의 실험은 곧 인간의 걷는 모습을 세밀하게 포착하는 연구로 이어졌습니다. 〈Walking with a Bucket in Mouth〉 시리즈(1884–1887)는 움직임을 해부하듯 분해하며, 걷기를 과학적이면서도 미학적인 탐구의 대상으로 제시했습니다.

Eadweard J. Muybridge, "Walking with a Bucket in Mouth; light-gray horse, Eagle," ca. 1884–1887, collotype print, w35.7 x h21.6 cm (Image). George Eastman Museum 컬렉션

머이브리지의 실험은 단지 사진 기술의 발전만이 아니라, ‘걷기’를 관찰하고 사유의 대상으로 전환시킨 시도였습니다. 이때 걷기는 단순한 생리적 행위에서 벗어나, 관찰되고 기록되는 하나의 수행으로 변모했습니다.

이후 예술가들은 이러한 시선을 이어받아 ‘걷기’를 다시 수행의 언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2023년 코리아나미술관은 이 일상적인 행위 ‘걷기’를 주제로 작업하는 예술가들을 돌아보았습니다. 개관 20주년을 기념한 국제기획전 《Step X Step》은 미술관이 지난 20년간 탐구해온 ‘신체’라는 주제를 다시 꺼내 들며, 걷기를 그 연장선에서 바라봅니다.

《Step x Step》 전시 전경 © 코리아나미술관


전시 제목의 ‘스텝(step)’은 걸음걸이를 뜻하는 동시에 춤에서 동작의 기본 단위를 의미합니다. 이번 전시는 이 두 가지 의미를 교차시키며, 걷기·서기·멈추기 같은 일상의 움직임이 어떻게 안무적 사고와 연결되는지 보여줍니다. 걷기가 일상의 동작이면서도 1960년대 이후 현대 무용과 퍼포먼스에서 중요한 안무적 언어가 되었듯, 이번 전시는 몸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이 어떤 감각과 사유를 불러오는지 살펴봅니다.

《Step X Step》은 미술관이 오래도록 연구해온 신체의 수행성을 다시 환기시키며, 걷기가 동시대 예술에서 어떻게 감각, 저항, 그리고 존재의 언어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에 참여한 일곱 팀의 동시대 작가들은 각자의 몸과 리듬을 통해 ‘걷기’를 어떻게 사유하고 수행하고 있을까요?

Bruce Nauman 브루스 나우만


브루스 나우먼, 〈Walking in a Contrapposto〉, 1968. 설치 전경 © 코리아나미술관 (사진: 홍철기)

좁고 긴 통로 안에서 브루스 나우먼은 두 손을 뒤통수에 얹고 천천히 걸어갑니다. 폭 50cm의 공간은 몸의 균형을 끝없이 조정하게 만들고, 나우먼은 걸음 사이사이에 고전 조각의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 포즈를 취합니다.

*콘트라포스토는 한쪽 다리에 중심을 두고 골반과 상체를 비틀어 S자 곡선을 만드는 자세로 살아 있는 신체의 율동감을 표현하기 위해 고안된 조형적 균형입니다.

그러나 나우먼의 콘트라포스토는 고대 조각이 보여주는 우아함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통로는 엉덩이가 벽에 닿지 않을 만큼만 허락된 최소한의 폭이며, 발이 바닥을 누를 때마다 오래된 바닥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나우먼은 중심을 반복적으로 이동하며 걸음을 이어가지만, 그 과정에서 긴장, 미세한 근육의 경련, 호흡과 흔들림이 화면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얼굴은 카메라 프레임 밖에 남겨져 있고, 관객은 오직 몸이 만들어내는 리듬과 비틀림, 그리고 단조로운 반복에 집중하게 됩니다.



브루스 나우만, <콘트라포스토 자세로 걷기> 싱글채널 비디오, 흑백, 사운드, 60분

(사진: Courtesy of Electronic Arts Intermix (EAI), New York. ⓒBruce Nauman / Artist Rights Society(ARS), New York- SACK, Seoul, 2023)

이 반복은 방향을 잃은 움직임처럼 보이기도 하고, 탈출구 없는 공간 안에서 스스로와 끝없이 마주하는 수행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우먼이 약 한 시간 동안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이 영상은, 걷기라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를 통해 ‘몸이 예술의 재료가 되는 순간’, 그리고 움직임 자체가 사유로 전환되는 과정을 드러냅니다. 힘과 균형의 상징이었던 콘트라포스토는 나우먼의 신체 안에서 피로와 집중, 부조리, 내면적 저항이 얽힌 일종의 ‘살아 있는 조각(live sculpture)’으로 변모합니다.


"... the inability to develop, to change yourself, this feeling of not being able to get away from yourself, plays a role in many of my videos." 
— 브루스 나우먼 (mumok 온라인 컬렉션 인터뷰 중)

나우먼은 자신의 비디오 작업 전반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감각”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고 말합니다. 이동하지 않는 걸음과 끝없는 반복 속에서 걷기는 수행의 언어가 되고, 시간은 두께를 갖습니다. 그리고 관객은 그 안에서 신체라는 매체가 지닌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마주하게 됩니다.


Every Ocean Hughes 에브리 오션 휴즈


에브리 오션 휴즈, <Sense and Sense>, 2010. 설치 전경 © 코리아나미술관 (사진: 홍철기)

바닥의 두 스크린에서는 스톡홀름 세르겔 광장에서 펼쳐진 퍼포먼스가 서로 다른 시점으로 상영됩니다. 휴즈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주목해 온 작가로, 이번 작업에서는 신체 기반 퍼포먼스를 지속해 온 뉴욕 기반 행위예술가 MPA와 협업했습니다.


에브리 오션 휴즈, <Sense and Sense>, 2010, 나무로 제작된 스크린에 2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무음, 15분 25초 (사진: 작가 제공)

퍼포머 MPA는 광장 바닥에 몸을 눕힌 채 마치 허공을 걷는 듯한 수평 이동을 수행합니다. 왼쪽 화면은 몸과 바닥의 마찰과 힘을 가까이서 보여주며 퍼포머의 ‘수평적 걷기’를 드러내고, 오른쪽 화면은 광장을 내려다보며 빠르게 걷는 사람들의 ‘수직적 움직임’을 동시에 제시합니다. 두 시점이 맞물리며 광장은 통로가 아닌 움직임의 층위가 겹치는 무대로 보이기 시작하고, 걷기라는 행위는 도시의 시간과 정치적 맥락을 새롭게 감각하게 만드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Tsai Ming-liang 차이밍량


차이밍량의 〈행자〉는 홍콩 침사추이의 번화한 거리 한복판에서 극도로 느린 걸음을 이어가는 승려의 모습을 따라갑니다. 배우 리강셩이 실제로 움직임을 거의 정지에 가깝게 조절해 만든 속도로, 한걸음에 약 25초가 걸립니다. 카메라는 도시의 소음과 광고판, 바쁜 발걸음 속에서 이 느린 신체를 고요하게 따라가며, 같은 공간 안에서 서로 다른 시간이 충돌하는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도시는 여전히 빠르게 흐르지만, 행자는 그 리듬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층위의 시간에 몸을 놓은 듯 움직입니다. 후반부, 행자가 파인애플 번을 베어 물고 노래가 흘러나오는 순간에는 이 다른 시간감이 더욱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차이밍량, <행자>, 2012. 설치 전경 © 코리아나미술관 (사진: 홍철기)

〈행자〉는 결국,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도시의 리듬을 다시 느끼게 만드는 작업입니다. 빠르게 걷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거의 멈춰 있는 한 몸이 만들어내는 이 시차는, 걷기라는 기본적인 행위가 얼마나 많은 감각적 층위를 갖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지하 2층으로 내려가기 전, 로비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작품입니다. 뉴욕의 밤거리에서 클라라 리덴은 뒤로 미끄러지듯 걸어갑니다. 익숙한 ‘문워크’ 동작이지만, 도시의 보행 리듬과 어긋나는 이 움직임은 걷기가 가진 방향성과 목적성을 비틀어 놓습니다. 반복되는 멜로디와 밤의 조명 속에서, 리덴의 몸은 도시 공간의 보이지 않는 규칙을 가로지르며 개인의 자리와 움직임을 다시 묻습니다.

클라라 리덴, <그라운딩>, 2018. 설치 전경 © 코리아나미술관 (사진: 홍철기)

지하 전시실에서 이어지는 〈그라운딩〉에서 리덴은 뉴욕 로어 맨해튼의 새벽 거리를 걷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동작을 반복합니다. ‘그라운딩’이 심리적 안정의 접지 기법을 뜻하듯, 작가의 몸은 도시의 차가운 지면에 닿았다가 다시 균형을 찾으며 공간과 신체의 관계를 갱신합니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방식의 걷기를 통해, 도시를 점유하는 신체의 리듬과 작은 저항의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전시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짜인 천 위에 자수가 놓인 강서경의 연작이 교차하듯 설치되어 있습니다. 멀리서는 하나의 회화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선과 형상이 춤의 동작처럼 연결되며 공간에 리듬을 만듭니다.

강서경은 조선시대 정간보의 격자 구조를 현대적으로 확장해, 회화·설치·퍼포먼스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번 연작의 형상은 작가가 진행한 워크숍에서 홍콩 초등학생들이 그린 드로잉에서 출발한 것으로, 천 위에서 다시 한번 움직임의 언어로 재구성됩니다.


작품 사이를 걸어가면 이미지들이 겹치고 흩어지며 또 다른 리듬을 만들어내는데, 전체 설치가 하나의 느린 안무처럼 공간을 형성합니다.

Jehyun Shin 신제현


신제현, 〈MP3 댄스-스텝〉, 2023. 설치 전경 © 코리아나미술관 (사진: 홍철기)

다섯 개의 모니터에는 발레, 검무, 태권도, 전통무용 등 다양한 장르를 기반으로 한 네 명의 퍼포머가 같은 지시어에 각기 다른 움직임으로 반응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신제현은 전통 무보(舞譜)를 MP3로 녹음해 안무 스코어처럼 사용하는 방식에 주목하며, 전승 과정에서 발생하는 ‘굴절’을 탐구해 왔습니다.

퍼포머들은 동일한 지시어를 듣고 움직이지만, 각자의 신체 기억과 장르적 습관이 서로 다른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가까워 보이지만 결코 동일하지 않은 스텝들은 걷기가 장르에 따라 다르게 형식화되는 과정을 드러냅니다. 마지막 모니터의 빈 화면은 관객에게 열려 있으며, 직접 들어가 자신의 스텝으로 안무를 완성해 볼 수 있습니다.

Pauline Boudry/Renate Lorenz

폴린 부드리/레나테 로렌츠


폴린 부드리/레나테 로렌츠, 〈거꾸로 움직이기〉, 2019. 설치 전경 © 코리아나미술관 (사진: 홍철기)

커튼 안에서 펼쳐지는 〈거꾸로 움직이기〉는 다섯 명의 무용수가 앞으로 가는 듯하면서도 뒤로 미끄러지는 모호한 움직임을 수행하는 영상 설치입니다. 이 작업은 쿠르드 여성 게릴라들이 적을 혼란시키기 위해 신발을 거꾸로 신던 전략에서 출발해, 후퇴가 저항이자 다른 방향의 움직임이 될 수 있음을 탐구합니다.

무용수들의 몸, 조명, 의상이 흔들리는 방향은 때때로 실제 움직임과 반대되며, 관객은 무엇이 ‘앞’인지 ‘뒤’인지 잠시 판단을 보류하게 됩니다. 바닥에는 영상 속과 동일한 댄스 플로어가 설치되어 있어 퍼포머의 무대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영상이 끝난 뒤 교차되는 조명 속에서 관객은 잠시 퍼포머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전시 스케치 영상]

글 작성 및 정리_코리아나미술관 학예팀/김소현

ⓒ코리아나미술관, 2025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참고자료]* 코리아나미술관 B1 *c-lab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Step x Step』 전시 도록, 코리아나미술관, 2023 도록 더 읽어보기


* Sharpe, William Chapman. 2023. 『The Art of Walking: A History in 100 Image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Phillips, Andrea. 2005. “Walking and Looking.” Cultural Geographies 12(4): 507–13. http://www.jstor.org/stable/44251060


Google Arts & Culture. 2025. “Walking: from subject to practice.” Accessed 2 Dec. 2025. https://artsandculture.google.com/usergallery/walking-from-subject-to-practice/sQLCwYWB7WdlIA


Bruce Nauman, interview in mumok Online Collection, “Walk with Contrapposto,” accessed 2 Dec. 2025, https://www.mumok.at/en/online-collection/detail/walk-with-contrapposto-258


[《Step x Step》 과거 게시물 다시 보기]

[작품 클로즈업 #1] 브루스 나우만, <콘트라포스토 자세로 걷기>, 1968

[작품 클로즈업 #2] 발화하는 몸짓: 신제현, <MP3 Dance-Step>, 2023

[작품 클로즈업 #3] 사각의 바깥 상상하기: 강서경, <자리 검은 자리_동_cccktps>, 2021-2022

[작품 클로즈업 #4] 안무는 저항의 도구가 될 수 있을까요?: 폴린 부드리/레나테 로렌츠, <거꾸로 움직이기>, 2019

[작품 클로즈업 #5] 밤의 도시에서 문워크를 : 클라라 리덴, <진보의 신화(문워크)>, 2008

[작품 클로즈업 #6] 느리게 걷기: 차이밍량, <행자>, 2012

[작품 클로즈업 #7] 도시에서 넘어지기: 클라라 리덴 <그라운딩>, 2018

[작품 클로즈업 #8] 에브리 오션 휴즈, <Sense and Sense>, 2010

[작품 클로즈업 #9] 브루스 나우만, <과장된 태도로 정사각형 둘레를 걷기>, 19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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