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 시소러스
*c-lab 2.0 프로젝트
김성은 <감각± 시소러스>
*c-lab 2.0 프로젝트 팀으로 참여한 김성은 연구자는 지난 <토킹투게더 in *c-lab>에서 "생각함과 감각함이 축조하는 미술관"이라는 제목으로 감각적, 신체적 실천을 통해 지식 수행의 장으로 변모하고 있는 동시대 미술관의 사례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또한 *c-lab 2.0 프로젝트 팀과 함께한 프로젝트 스터디에서도 주제 '감각'에 대한 심층적인 탐구를 위해 다양한 자료를 공유해왔습니다. <감각± 시소러스>는 그동안 *c-lab 2.0의 다양한 활동 안에서 오고간 대화, 토론, 탐구로부터 수집한 감각의 여러 층위와 그 주변에 모여드는 미학, 과학, 문학, 사회적 개념들의 관련어, 유의어 간의 관계를 매핑한 연구 프로젝트입니다. 김성은 연구자의 관점과 해석을 바탕으로 ‘감각’에 대한 더하기(+) 빼기(-) 사유의 과정을 시소러스(thesaurus)의 형태로 선보입니다.
감각± 시소러스
김성은(삼성미술관 리움 책임연구원)
감각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1. 신체가 바깥의 어떤 자극을 알아차리는 기능.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2. 사물에서
받는 인상이나 느낌, 사물의 존재함이나 중요성에 대해 예민하고 직관적으로 의식하는 것.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감각은 관념이나 지식처럼 머릿속 생각이나 지적인 이해와는 대척이라고 간주되는, 혹은 그러한 단계에 도달하기 전의 어떤 신체적 경험과 밀접하다. 또한
감각적 디자인, 감각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에서처럼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어떤 특출한 민감함을 지닌 대상이나
인물, 이를테면 예술가들을 칭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c-lab 2.0 프로젝트 팀(강호연, 뭎[mu:p], 손과얼굴, 양숙현, 김성은)의 구성원들이 동시대 미술 작가들인 점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예술로써만이 감각을 온당하게 연구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 그렇다면
애초에 함정과 한계가 많은 이론적 연구자로서 감각에 접근하는 길은 무엇일까.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참여 팀들이 각자의 작업을 발전시키고 또 함께 모여 공부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솟아오르고 수그러들던 말과 글이 단출하면서도 ‘감각적인’ 형체로 정리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소러스 같은 사전의 구조라면 어떨까. 일반 사전이 각 단어의 의미를
기술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면 시소러스는 동의어, 유의어, 반의어, 상위어, 하위어, 연관어
등 단어들의 관계에 치중한다. 7개월 동안 감각을 에두르고 파열시킨 단어들의 거대한 덩어리를 백과사전적으로
더듬어 가면서 그중 극히 적은 몇 가지를 선별하여 분류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겠는가 반문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백과사전식 탐문의 유효성은 바로 그 선별과 분류의 임의성이
가져오는 두서없음과 그로 인해 본질적으로 발생하는 빈자리가 결국 지식이라는 것에 내재한 감각적 차원을 드러낼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독일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는 철학, 과학, 예술, 수학, 역사, 종교를 아우르며 자신이 ‘낭만적 백과사전’이라 부르던 원고를 남긴 바 있다.[1] “모든 단순화는 복잡화의 다른 표현”이라는 견지에서 계몽적 백과사전의
계층과 체계를 해체하고 이성적 사고, 예술적 상상, 물리적
감각을 통합하며 ‘꽃가루’처럼 지식의 이동을
촉발하는 백과사전적 기록을 남겼다.
<감각± 시소러스>는 프로젝트 기간 동안 논의된 모든 내용을 포괄하고 대표하는 단어들을 추리려 하지 않았다. ‘감각’ 안에 담겨 있는 여러 층위의 의미, 그 주변에 모여드는 미학적, 문화적, 사회적, 과학적 개념들을 미술관과 미디어에 관심을 둔 연구자의 감각으로 포착했을 뿐이다. 자의적이며 심지어 우발적이기도 하다. 그렇게 붙잡은 단어들이 당연하게도 쏟아내는 질문들을 감각화하는 방식으로서 단어들을 도해하고자 했던 시도가 바로 이 시소러스다. 조르주 페렉은 ‘공간’의 좌우에 붙는 단어들에 따라 달라지는 공간의 종류를 나열한 『공간의 종(種)』(2008)에서 지면의 페이지, 침대, 아파트, 거리, 동네, 마을, 세계를 넘나들며 일상과 기억의 문제를 다룬다.[2] 미셸 투르니에는 짝지를 이룬 단어들의 사전이라 할 수 있는 『생각의 거울』(1998)에서 예를 들면 ‘프로펠러와 지느러미’ 항목을 인체의 심장 박동과 예술가의 삶에 대한 사유로 맺고 있다.[3] 이들이 전혀 비약으로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문학가의 예술적 감각에 충실하여 생각의 지도를 그려나갔기 때문이다. <감각± 시소러스>는 한정된 수의 개념들을 뭉쳐 놓고 떼어 놓기를 반복하며 ‘감각’에 대한 ‘더하고 빼기’ 사유를 실험한 형식으로, 감히 이런 문호들을 흉내 내기다.
[1] David W. Wood, ed. Novalis: Notes for a Romantic Encyclopaedia:
Das Allgemeine Brouillon (New York: SUNY Press, 2007).
[2] Georges Perec, Species of Spaces and Other Pieces, ed. John
Sturrock (London: Penguin Books, 2008).
[3] Michel Tournier, The Mirror of Ideas, trans. Jonathan F.
Krell (Lincoln; London: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98), 27-28.
affect 정동
감정, 정서, 감각과 혼용되는 단어인 ‘정동’은 이들 단어 사이의 무엇이다. 신체와 결부된 비언어적, 비재현적 힘이나 효과, 그리고 그에 따른 지각과 반응과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엄밀한 정의가 쉽지는 않다. 심리학과 정신분석학, 철학과
미학, 젠더이론, 문화이론,
신경과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학문 분야에 걸친 개념이기도 하다. 마음과 생각이 어떻게 몸의
영향 안에 있는지, 마음과 생각이 세상을 향한 몸의 행위로 어떻게 증폭되는지에 정동은 주목한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까지 포함하는 모든 신체들이 영향을 주고 받는 이행적 관계를 정동이라고 할 때, 신체들 사이를 오가는 감각적 힘은 이행을 통해서만 드러나고 지속된다.
agency 행위력
사람과 사물은 그 어느 쪽도
다른 한쪽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통해 비로소 둘 다 주체 혹은 객체로 정의되고 형성된다.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도 행위력을 갖는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비인간이란 예술품이나 도구처럼 인간이 고안하고 생산해내는
모든 산물, 그리고 인간과 공존하는 생태적 대상 일체를 가리킨다. 미술
작품 역시 작가나 관람자의 주체성을 표상하고 의도를 재현하는 객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발휘되는 어떤 행위력의 원천인 주체이기도 하다. 행위력의 관계가 맺는 장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행위자 연결망’ 이론이며, 이 안에서 사람과 사물이 사회적, 문화적 관계를 매개하고 창조하는 데 있어 감각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body 신체
신체는 동력으로 움직이는 엔진이자
뉴런으로 된 정보 시스템이다. 인체를 작품의 소재이자 매체로 삼은 작업들이 오래 이어져 온 미술사에서
최근 퍼포먼스 아트와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미디어 아트를 두 축으로 엔진이자 뉴런으로서 인체의 지각 경험을 보다 정교하게 탐구하고 있다. 날 것의 지각이 사유, 정신, 관념, 마음이라 부르는 것으로 몸에 새겨지는 데에는
언어나 매체의 조건이 작동한다. 따라서 이들은 신체의 내부에서 활성화되는
초월적이고 내재적인 실체가 아니라 세계와의 감각적 관계로부터 형성된다. 인체의 피부 막처럼
기능하는 여러 인터페이스를 통과하며 몸 바깥의 물질세계와 서로 삼투하는 것이다.
choreography 안무
몸짓을 공간에 써 내려간다는
영어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안무는 무용수가 무대 위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무용 동작의 형태와 위치와 순서를 짜고 표기하는 것이었다. 동시대 미술 담론에서 안무는 무용과 무대라는 한정된 범위를 뛰어넘어 다능한 개념적, 실천적 틀이 되고 있다. 신체의 물리적 특성, 신체의 움직임이 시공간과 맺는 관계, 그리고 신체들 간의 상호작용을
주된 요소로 하는 미술 작업을 안무적이라 특징짓는다. 또한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서 몸의 움직임을 분석하고 함께 모여 대화, 교류하는 사유의 구조와 과정을 일으키는 기획 또한
안무로 접근한다. 안무는 사전 계획된 연출성과 참여하는 신체의 즉흥성 사이의 역학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communal 공동의
감각은 개인 신체의 차원으로
이해되곤 하지만 실은 공동체를 품고 있다. 시인 권혁웅은 「시와 공동체」(2011)에서 심상이 단순히 상상력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자극이 신체에 적힌 감각의 소산이며
“말이 막히고 문장이 끊기고 단어가 흩어진 자리”가 타자, 바깥의 실재라고 말한다. 베스 힌더리터 등 미술 이론가들이 펴낸
『감각의
공동체』(2009)는 감각적인 것을 나누는 일로써 미학이 ‘공공’, '공통'을 되묻고 지각, 사유, 행동의
공유 양식을 재편하는 정치와 유사한 사회적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감각의 공동체란 공동의 것에 대한
가능성 중 가시적이고 이해된 감각과 그로부터 단절, 분열된 감각을 나누는 공동체이다.
curatorial 큐레토리얼
미술관이 지식 체현의 장이라는
관점에서 큐레이팅의 개념 역시 변화하고 있다. 원래 형용사인 ‘큐레토리얼’이 명사화된 것인데, 전시의 물질과 형식이 달라지고 그 안에서의
감각적 경험과 배움 역시 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시각 중심, 작품 중심의 전통적 전시 만들기에 국한되어
있는 큐레이팅과는 다른 각도의 개념이 필요하다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지식 생산과 수행의 여러 방식과
이를 위해 혹은 이를 통해 촉발된 시공간, 나아가 이론화, 역사화, 정치화를 뜻하는 것으로 큐레토리얼은 전개되어 왔다. 이러한 큐레토리얼의
견지에서 전시를 비롯한 미술관의 모든 프로그램은 그 안의 수행하는 신체가 새로운 체감을 태동시킬 수 있도록 하는 살아있는 운동체이다.
food 음식
미술사에서 음식은 일상과 예술의
관계, 감각적 경험을 통한 정치적 진술 등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요긴한 소재였다. 퍼포먼스 인류학자인 바바라 키센블랏-김블릿(1999)은 가장 사적인 행위이자 공동체의 의식으로서 집단이 함께 수행하는 음식 먹기가 요리를 실행해 완성하여
제공하는 행위, 관습, 규약, 금기에 따라 적절하게 처신하는 행위, 스펙터클로 보여주고 감상하며
식별하고 평가하는 행위라는 세 측면에서 퍼포먼스의 특성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음식은 미각이라는 감각에
국한되기 보다는 입, 코, 눈, 귀, 피부 등 모든 감각을 동원하게 한다. 뭎의 <맑고, 높은, 소리>에서 음식의 감각적 경험은 시각, 청각 등 감각 특정적 영역으로 세분화되어 분리되기 이전의 원초적 예술 경험을 상기시킨다.
immaterial 비물질적
물성이 없는 물질로 된 예술이나
현상을 뜻할 때 사용되는 표현인데, 가령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 형태의 개념 미술, 퍼포먼스, 미디어 아트 같은 것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비물질적이라는 말은 ‘물질적’의 반의어라기 보다는 언어나 정보, 빛이나 소리처럼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형체가 없을 뿐 비정형인 물질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모든 것이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되어 네트워크
시스템에 올라탈 수 있는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은 물적 조건인 셈이다. 물질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서
비물질성은 신체로부터 분리된 지성, 노동, 감정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고 있으며, 인간 정체성과 관련해 감각적 육체에 대한 새로운 유물론적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immersion 몰입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온 신체의 경험적 차원이 강조되는 전시나 작품을 몰입적이라 부른다. 전자가 화이트
큐브 같은 전시실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일에 가깝다면 후자는 블랙박스의 영상이나 VR 기어를 착용하고
보는 이미지처럼 의미보다는 여러 감각이 동시에 활성화되는 신체적 체험을 부각한다. 이러한 몰입 경험은
대규모의 스펙터클이 창조하는 건축적 압도감이나 1인칭 드라마의 극작이 가져오는 흡입력에 의해 이뤄진다. 그러나 어떤 대상을 지각한다는 것이 신체 안에서 일어나는 증상이 아니라 신체가 수행하는 행동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이분법적 도식은 유효하지 않다. 또한 디지털 환경에서 무수한 정보원에 늘 접속해 있는 상태에서 겪는
감각의 상시적 과잉은 몰입과 산만의 관계를 재고하게 만든다.
interaction 상호작용
작가는 작품을 만들고 관객은
이를 감상하는 일방향의 관계가 아니라, 참여를 촉진하고 행동을 유발하는 양방향 지향의 작업에 바탕이
되는 것이 상호작용이다. 관객이 작품을 원하는 방식으로 살펴보도록 하거나 다양한 반응을 유도하는 단계, 관객이 작품에 일정한 행동을 가하거나 주고받는 대화의 형식으로 참여하는 단계,
나아가 아예 작가와 관객이 협력하는 단계로 관객의 행동에 따라 작품의 최종적인 형태가 달라질 수 있는 상호작용으로 진화해 왔다. 인터렉티브 기술을 활용한 미디어 아트부터 일시적이거나 영구적으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는 상황을 구축하는 관계미학
계열의 작업까지 관객의 참여, 참여자들의 상호작용이 불가결한 성립 조건이다.
interface 인터페이스
두 시스템 사이의 경계, 접면을 가리키는 말인 인터페이스는 인간이 다양한 미디어를 사용하도록 돕는다.
스마트폰 같은 미디어가 신체의 대체를 뛰어 넘어 보철의 임무를 맡게 되면서, 두 세계 간의
매끄럽고 완벽한 소통에 치중하던 인터페이스는 미디어와 신체의 관계가 다양한 방식으로 매개되고 재구성되는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스마트폰의 인터페이스인 스크린도 평평한 시각적 표면으로 디지털 세계를 반사하는 장치가 아니라 신체와 일체화되면서
오히려 물질적 구체성을 상실하고, 인터페이스로서 인간의 신체적 감각을 강화하며 인체와 공조한다. 양숙현은
intermedia 인터미디어
플럭서스 작가 딕 히긴스가 1965년 처음 사용한 ‘인터미디어’는
“미디어들 사이에 속하는” 예술을 뜻한다. 단순히 서로 다른 예술 매체를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예술 장르 간 교차,
교섭을 통해 기존 감각 체계를 교란하고 재조직하면서 미디어의 범주들 사이에서, 매체와 매체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지각의 공간을 찾으려 한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의 맥락에서도 다양한 매체들이
서로 만나고 어긋나며 생기는 틈새, 그로부터 새로운 감각과 지각의 발생을 도모하는 것이 인터미디어다. 여러 매체를 동시에 혼합적으로 사용하는 다중 감각, 하나의 감각이
다른 감각을 일으키는 공감각적 경험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미학이다.
knowledge 지식
과거 미술관에서의 지식은 권위
있는 교수의 강연, 큐레이터의 전시 도록, 전문 도슨트의
투어, 시청각 가이드 등 구술과 활자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미술관이라는 공간에 위치한 신체의 구성으로써 ‘파악’되는, 즉 손으로 잡아 쥐는 것처럼 신체적으로 본질을 이해하게 되는 지식에 초점이 맞춰진다. 물리적 매체로서의 신체에 쌓인 기억과 경험은 일종의 감각적 지식으로 계속 재생되고 실험되고 타자와 나누는 가운데
또 다른 새로운 지식을 낳는다. 신체의 감각 작용과 경험에 의거한 지식은 큐레이터나 아티스트의 실천적
연구를 통해서도 생산되는 것으로 보는 미술관 연구의 흐름이 있다.
labor 노동
노동은 몸을 움직여 일을 한다는
사전적 정의뿐만 아니라 정신 노동과 신체 노동, 자유로운 노동과 노예적 노동의 구분처럼 사회적, 정치적으로 여러 함의를 담고 있다. 리처드 세넷이 『장인: 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생각하는 손』(2008)에서 말하듯 육체의 노동은 지적인 이해의 하위 계급이
아니라 숙련도에 따라 지식을 선취하는 장인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굳은살이 박여서 피부가 두꺼워지면
감각은 당연히 둔화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정반대의 일이 나타난다.
굳은살은 손에 퍼져있는 신경말단을 보호함으로써 탐색 행위의 머뭇거림을 줄여준다.” 탈규율화된
감각으로 벌이는 예술가의 작업은 오늘날 비물질적 노동에 대한 논의와도 연관 지어 살펴 볼 측면이 있다.
language 언어
감각기관을 통해 지각을 경험화하고 언어를 통해 이를 관념화해 인지하는
과정을 감각 본연으로 환원시키고자 한 강호연
liveness 라이브니스
현존성, 현장성으로 풀이할
수 있는 라이브니스는 연극, 공연, 퍼포먼스의 특징이다. 작가나 배우와 관객이 동시에 같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물리적 상태, 거기에서
일어나는 순간적이고 반복 불가능한 사건을 직접적으로 나누는 경험과 정서와 인식 일체를 의미한다. 실시간
영상 매체가 무대 장치로 활용되거나 무대에서 벌어지는 일을 밖으로 전송하며 개입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물리적 동시성이 아니라 지각의 공유 강도가
라이브니스를 결정하는 함수가 되고 있다. 매개되었다는 점이 현장성, 현존성의
부재를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으며, ‘함께함’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경험을 한다는 사실 자체보다 감각적으로, 감정적으로
얼마나 강하게 서로 연결되는가에 달려 있다.
memory 기억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인간의 기억을 아카이브나 데이터베이스로 외재화한다. 디지털 미디어와 온라인이라는 터에 힘입어 나의 기억을 직접 겪지 않은 타인도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개인의 기억이 사회적 기억, 역사적 기억으로 나아가는 경로는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띤다. 외부의 장치에 기록하여 사라지지 않도록 함으로써 기억은 보존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기억들은 현재로 끊임없이 불러내 체현할 때에야 살아남는다.
신체적 기억을 호출하는 손과얼굴의 <상상을 상상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짓기>도 과거를 입증하고 서술하는 기억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를 생산하는 기술로서의 기억, 그 기억이 현재를 살도록 하는 감각적 연습이다.
monument 기념비
계속해서 기억하고 함께 기리기 위한 기념비의 목적은 때로 이름을
새기는 것만으로도 달성되지만, 그 기억을 영원히 움키고 붙들려는 욕망은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세계가
겹쳐지는 위상 공간을 건축적 구조물로 세우기도 한다. 스피노자, 들뢰즈, 바타이유, 그람시에 대한 기념비 프로젝트 작업을 한 토마스 허시혼
같은 미술가들은 기념비의 메시지가 주는 영원성을 관객이 무비판적으로 바라보지 않도록 메시지의 단순한 수용자에 머물지 않고 메시지의 구축에 함께
참여하는 플랫폼으로서 기념비를 제시한다. 손과얼굴의 <상상을
상상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짓기>도 참여자들이 사적인 기억의 파편들을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자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쌓고 배치하면서 이를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어떤 이름으로 호명하여 다시 살게 하는 기념비 플랫폼이다.
movement 움직임
무용가 루돌프 폰 라반은 움직임이 살아있는 건축이라고 말한 바 있다(1966). 움직임은 공간에서 이동하고 멈추고 또 공간을 점유하는 일의 위치와 응집의 관계로부터 비롯된다. 움직임에 따라 창조되는 경로를 추상화 해보면 건축 도면을 닮은 다이어그램이 나오는 이유다. 미술관 관객의 신체도 흘끗 보기와 응시하기 사이를 오가며 벌이는 걷기라는 움직임으로, 큐레이터가 공간에 기입해 놓은 스크립트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고유한 리듬으로 공간의 스크립트를 써 나간다. 언뜻 연극적이라 느껴지는 뭎의 <맑고, 높은, 소리>는
신체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공간의 구조, 신체의 움직임에 내재한 구조,
그리고 신체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구조를 다층적으로 수행하는 퍼포먼스다.
pedagogy 교육학
교육학이라 번역되는 ‘페다고지’가 동시대 미술 담론에서 긴요하게 언급되는 것은 미술의 정치적 역량에 대한 관심과 상관이 있는데, 누가 가시적이고 누가 발언을 하는가의 문제는 누가 지식을 생산하는가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시각 언어, 디지털 기술에 대한 문해력을 갖지 못한 이들이
지식의 권력 관계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의식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감각적 경험의 규범을 탈피하는
일, 즉 지식으로 습득된 것을 의심하고 반문하는 탈배움(unlearning)이야말로
주체 해방의 관건이라는 의식이다. 2016년 학술지 『퍼포먼스 리서치(Performance
Research)』가 ‘급진적 교육’에
관한 특집 호를 실은 사례에서 보듯 탈배움의 기획으로서 퍼포먼스의 잠재력 덕분에 페다고지를 주제로 퍼포먼스와 결합한 연구와 작품이 빈번하다.
performance 퍼포먼스
라이브 성격의 공연 예술이나 극 예술, 시각 예술 맥락의 퍼포먼스 아트에 이르기까지 ‘퍼포먼스’의 범주는 넓다. 특히 미술계에서는 전문적인 퍼포머 외에 일반인들이
작가의 위임과 지시를 따르는 단순한 참여뿐만 아니라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협업의 형태로 함께 만들어 나가는 퍼포먼스도 늘고 있다. 일상에서 발생하는 감각적 수행의 사건들을 미술의 영역으로 가져와 감각의 전이를 통해 사적인 신체와 공적인 신체의
경계를 경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렉처 퍼포먼스’라 불리는
작업은 강연자의 신체와 청중들의 신체가 발휘하는 감각의 수행적 힘 속에서 강의라는 형식이 전제하는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를 낯설게 하여 재고할 수 있게 한다.
performative 수행적
동시대 미술의 이론적 주요 개념 중 하나이면서 퍼포먼스 아트와 관련된
용어로 종종 오용되는 수행성은 애초에 언어철학적 개념이었다. 존 오스틴이 언어의 행위력을 가리키기 위해
처음 사용한 단어로(1955), 말이나 글이라는 기호가 발화되어 어떤 현실을 만들어내는 작용을 하는
것을 말한다. 수행성을 젠더 이론과 결합했던 주디스 버틀러는 최근 이를 더 발전시켜 수행적 행위들이
합심하게 되는 신체적 회합(assembly)이 가져올 수 있는 정치적 힘을 논하기도 했다(2015). 어떤 일부 유형의 작품만이 수행적이기보다는 작품의 의미가 생산되는 데 있어 주어진 시공간의 문맥과
특정한 신체적 차원의 행동이 유발하는 우연하고 불확실한 영향과 결과를 조명하는 것이 수행성이라고 볼 수 있다.
posthuman 포스트휴먼
기계를 통해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고 인간을 넘어서는 것. ‘포스트휴먼’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사이보그처럼 생명과학 기술이나 로봇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과 기계가 하나로 융합된 모습들이지만
이는 사실 ‘트랜스휴먼’에 가깝다. 포스트휴먼은 인간의 신체와 정신 모두 디지털 정보로 변환되어 컴퓨터 처리의 대상이면서 네트워크 시스템의 일원이
됨으로써 사실상 마음과 물질의 이분법적 구분이 없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태어난 포스트휴머니즘은 세계와 감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체가 컴퓨터화, 네트워크화된 동적 환경에
통합되면서 개인의 정체성과 주체성이 재정의되어야 한다는 자각과 성찰을 바탕으로 한다.
prosthetic 보철의
소실된 신체 부위를 인공적으로 보정하는 의료 목적이었던 보철 기술은
테크놀로지가 재구성한 신체로서 인체에 대한 의식을 변화시켰다. 의료용 보철은 신체 부위의 기능을 복구할
수 있도록 착용함으로써 육화되었다면, 오늘날 휴대전화나 네비게이션 같은 미디어는 거의 착용에 가까울
만큼 인체와 한 몸을 이룸으로써 신체의 지각과 인식을 확장하는 또 다른 보철이다. 미디어와의 보철 관계는
인간의 자아감에도 영향을 미치는 기제이다. 나아가 인체를 하나의 살아있는 미디어로 전환시키는데, 감각에 체화된 정보 체계는 지각의 새로운 학습을 야기하고 이는 신체가 다시 거대한 정보 시스템으로서의 세계와
접속하는 여러 인터페이스 중 하나가 되도록 한다.
ritual 제의
예컨대 신성한 힘의 계시를 듣고자 하는 제의나 인생 주기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기리는 의례는 궁극적으로 사회의 신념과 가치를 구성원들에게 전파하여 공유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인류학자 빅터 터너는 『제의에서 연극으로』(1982)에서, 공공적인 의식은 구술적, 언어적 코드뿐만 아니라 춤, 몸짓, 노래, 낭송, 식사 같은 예술이라 부를 수 있는 형태의 감각적 코드가 함께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행위와 사물이 상징과 의미를 생산하는 방식은 이념의 축과 감각의 축이 변증법적으로 붙어있어서, 이념은 사회적 규범의 중요성을, 감각은 개인 신체의 감정적 반응에
초점을 맞춘다. 뭎의 <맑고, 높은, 소리>는
제사장, 손과얼굴의 <상상을 상상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짓기>는 통과의례의 모티프를 차용한다.
scenography 시노그래피
그리스어에서 연극의 무대나 장면을 뜻하는 ‘스케네(skene)’와 그리고 쓴다는 의미의 ‘그라포(grapho)’에서 유래한 시노그래피는 공간을 구체화시키는
예술적 작업이다. 무대 디자인뿐만 아니라 미술관의 전시나 퍼포먼스의 공간 연출에 대해서도 사용된다. 극 예술 무대를 서사의 재현을 돕는 도구들로 꾸미는 데에서 출발했던 시노그래피는 새로운 감각과 지각을 발생시키는
공간을 구축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디지털 미디어 기술의 활용도 높아지면서 시노그래피는 이제 무대의
전경과 배경, 그리고 청중과의 구분을 허물고 그 곳에 있는 모든 신체들을 에워싸는 형태로 구현된다. 이질적인 요소들의 물질적, 정서적 관계가 맺고 끊어지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비로소 공간이 창조되는 것에 주력하는 것이다.
sound 소리
시각이라는 감각이 지배해온 미술의 위계에 가장 강력하게 도전해 온 하위 감각은 아마도 청각일 것이다. 소리는 미술의 영역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작가들은 음악, 정보, 소음, 그리고 침묵으로서의 소리를 재료로 삼아 오랫동안 작업해 왔다. 물질성이 없는 소리는 규정된 틀에 쉽사리 포획되지 않으며, 청각적이기만 한 게 아니라 시각적이면서 촉각적인 대상으로도 경험할 수 있다. 또한 소리는 물리적 현상이면서 언어적 의미와 사회적, 문화적 가치를 동시에 발현한다. 강호연의 <De-ideation>은 고전음악 라디오 방송을 실시간으로 크게 틀어 놓지만 음악이라는 의미 자체를 독해하기는 어렵도록 소음에 가까운 소리로 변조되고 설치물의 다른 소리 요소들과 어우러져 오히려 소리의 질감 같은 것이 촉각적으로 느껴진다.
uncanny 기묘한
친밀했던 것이 순간적으로 다른 세상의 존재처럼 다가오는 경우, 익숙한 대상에게서 예기치 않게 느껴지는 낯선 감각을 뜻하는 정신분석학 개념인 독일어 'unheimlich’에서 왔다. 왜곡된 지각 경험을 주는 가상현실
체험에서 분명히 촉각적이되 나의 신체를 벗어나는 것 같은 감각, 디지털 이미지나 기계적 형상으로 된 존재가 인간과 닮을수록 호감이 커지지만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오히려 기이한
느낌을 받는 것도 해당된다. 로봇공학에서는 이에 대해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살아
있는 듯하지만 생명이 없는 시뮬라크르가 주는 서늘함, 섬뜩함은 인간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없는 불확실한
상태에 기인한다.
virtual 가상의
가상 공간은 현실이 아닌 세계, 컴퓨터
화면 속 허상의 세계이며 우리의 신체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여기’와는
구별된다. 이 같은 과거의 믿음은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함께 가상 현실도 ‘현실’이라는 믿음으로 바뀌고 있다.
높은 해상도로 현실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사실적으로 구축된 세계여서가 아니라, 가상 공간의
정보 네트워크와 현실의 삶이 분리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던
세상을 모방하던 가상성은 세상에 대한 감각과 지각을 증강시키더니 어느새 바깥으로 넘쳐 흘러 그 세상 자체가 조직되는 방식을 바꿔놓고 있다. 양숙현은
visceral 내장적
‘이지적(cerebral)’과 쌍으로 쓰이기도 하는 이 단어는 어떤 신체적 경험이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성격일 때 이를 묘사하는 표현이다. 말 그대로 내장으로부터, 인체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부터 형언하기 어렵지만 감정적으로 지각되는 느낌, 그러한 감정에 동반되거나 또는 독자적으로 신체 자체가 생리적으로 변화하고 장애를 일으키기까지 하는 상태를 포함한다. 설명이나 담론을 통하지 않고 즉각적이고 즉물적인 반응이나 경험을 하게 되는 작품이나 전시를 수식하는 형용사로 자주 쓰인다. 촉각이나 근감각 경험이 주가 되는 경우뿐만 아니라 영상 매체를 이용한 작업에서도 지적으로 매개된 인식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매개된 감각으로서의 내장적 지각이 일어날 수 있다.
연구자 소개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삼성미술관 리움 책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미술관과 현대미술 이론, 문화인류학을 연구하는 기획자이다. 아티스트, 큐레이터, 인류학자의 교차 지점, 미디어 아트에 있어 사물의 작용, 지식 수행의 장으로서 미술관의 감각적 차원과 신체성 등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며 미술관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2011-14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큐레이터로 일했고, 현재는 리움에서 교육, 공공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